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군 방산무기 수입사 (문단 편집) === 1960~70년대 === 월남전이 시작하면서 미군의 지원으로 대한민국군의 많은 것이 변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군의 전력 증강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한국이 베트남전에 미국에 이어 2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면서 공여 받는 입장임에도 미국을 상대로 어느 정도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던 시기였다는 점이 맞아떨어진 시기였다. * 미군 [[군사 고문단]](2번 항목)에 대한 한국군의 자세도 넓게 보면 이 항목에 포함시킬 수 있겠으나 이쪽은 남아도는 물자를 그냥 선심성으로 처분한 것에 가깝다.[[군사 고문단#s-2|#]] * 북한의 [[MiG-21]] 등의 위협에 한국 공군은 미국에 새로운 기종의 전투기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이에 [[F-104]]를 검토하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이후 미 국무부의 정책 변화로 이를 [[F-5]]로 변경하자 한국 측에서 반발하였으나 공짜로 퍼주는 물건인 만큼(...) 한국 측의 주장이 강하게 먹힐 수 없었고 F-5를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F-104가 독일에서 [[F-104#s-4|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각하면 F-5를 도입한 게 결과적으로는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비록 원하는 기종은 아니었지만 이는 한국군이 최초로 도입한 초음속 전투기라는 데서 의의가 있다. *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서서히 철수하기 시작하자 남베트남은 미국한테 무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그냥 버리기는 찜찜했는지 적당히 사용할만한 전투기로 F-5를 제공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군은 이 기종을 운용하지 않았기에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던 한국의 F-5를 제공하기로 하고 한국 공군에 빌려줬던 [[F-5]]A 프리덤 파이터 36대를 도로 가지고 가겠다고 통보(...)하였다. 물론 한국에서는 F-4D와 1:1로 맞바꿀 것을 요구하였는데 당시 [[옥만호]] 공군참모총장은 "F-5A 못 준다. 정 가져가려면 팬텀 주고 가져가라"고 했다. 또한,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주한 미 대사인 하비브 대사가 한국에서 아몰랑을 시전하자, 국무총리(김종필)에게 “이건 한국 게 아니라 미국 소유 전투기입니다. 주인이 달라는데 못 주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라고 따졌다고. 김종필이 답하기를. “전투기 소유주가 미국임은 나도 분명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일단 한국 땅에 온 이상,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주인이 한국으로 바뀌었소]], [[배째|우리가 못 주겠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를 시전하며 [[배째|미친 척]] 했다고. 물론, 엄밀히 따진다면 이 프리덤 파이터들도 미국의 재산이었으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보상적 성격, 한국군 전력 강화에 대한 필요성 등을 이유로 미국은 절충안으로 F-5와 F-4를 2:1로 교환하는 것을 제안하고 18대의 팬텀을 제공한다.[* 당시 교전비가 2:1 정도로 평가되어 한국에서 마지노선으로 2:1 교환비를 못 박은 것, 즉 수는 줄었지만 국력 손실은 없었다.][* 심지어 F-4 팬텀을 줄 테니 F-5를 달라고 하니, 한국땅에 F-4 팬텀이 도착하면 주겠다고 버텨서 결국 F-4 팬텀 1호기 도착과 동시에 F-5를 띄워서 보냈다.] [br]이후 밝혀진 밀갤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때 [[옥만호]] 공군참모총장은 애초에 3년간 임대만 약조했을 뿐 종전 후 미국이 도로 찾아가려 하자 후임인 [[주영복]] 공군참모총장이 방위 성금을 걷어 완전히 구입한 기체[* [[https://www.youtube.com/watch?v=XyWk6VQzmT8|방위 성금 헌납기]]]였다. 팬텀기 도입에 관하여 [[장지량]] 장군이 남긴 회고[* [[http://www.hani.co.kr/kisa/section-001005000/2005/10/001005000200510101813781.html|67년 팬텀기 도입 때도 미국 ‘압력’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 국방일보에 비사 밝혀]]]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못 주는 F-5A'라는 건 '''미군이 빌려준 것'''이지 한국 공군의 것이 아니다. 즉 이 당시 F-5A는 미군의 군사원조계획에 따라 무상공여된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줘버린 것은 아니고 '무기한 장기 임대'라는 형식으로 줬던 것. 무기 체계는 타국에게 공짜로 인도하는 것도 여러 가지로 나름 골치 아픈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장기임대나 '100달러 받고 팔기' 같은 꼼수를 잘 쓴다. 주한미군 소속 F-5A를 가져가려 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는데, 미 공군은 F-5A를 운용한 적이 없다. F-5C라는 기종만 베트남 전선에서 잠깐 썼을 뿐... 결국 미군은 자기네 '''B급 장비'''를 빼가려고 했다가 되려 '''A급'''을 한국군에 (빌려)주게 된 꼴이 되었다. 이 일은 한국 혼자 저지른 게 아니라 배후에서 [[맥도넬 더글라스]]사(현 [[보잉]]사)가 F-4 팬텀을 팔기 위해서 한국에 제법 상당한 로비를 했다는 이야기가 당시 공군총참의 입에서 나왔으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물먹은 건 미국 정부 하나뿐인 셈이다.[br] 한편, 미국이 F-104를 주려고 했는데 박정희의 결단으로 F-4 도입이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상당히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당시 미국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문서에서는 처음부터 F-4만이 거론되며 F-104를 주려고 했다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군이 요구한 사양에 맞춘 팬텀이 1966년에 이미 시험비행 중이었으며 영국 해군은 1964년에 자신들이 요구한 사양에 맞춘 팬텀(Phantom FG.1 미국식으로는 F-4K)을 주문한 상태였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http://www.phantomf4k.org/history|The Phantom F4K Variant as operated by the Royal Navy]]] 물론 엔진을 포함해서 기체를 전체적으로 손을 봐야 했기에 실제로 인도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br] 아쉬운 부분이라면 미 공군이 한창 사용하려던 F-4E가 아닌 F-4D를 들여왔다는 것. F-4E는 미 공군의 강력한 요청으로 M61A1 기관포([[발칸포]])를 기수 부분에 장착하여 근접 격투전 시 공격 수단이 없다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F-4D는 파일런에 기관포 포드를 장착하는 방식으로 운용했다. 이렇게 운용하면 폭탄이나 미사일을 장착해야 하는 파일런 하나를 낭비하게 된다.] 한국도 F-4E를 요구했었지만, 미 공군에서도 모자란다고 아우성치는 물건이라서 당시 재고가 넉넉하던 F-4D를 받게 된 것... 그러나 한국 공군에서는 주로 전폭기로 운영했기 때문에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쉬운 게 없다는 건 아니다. F-4D의 무장 모드 변경 키가 계기판에 달려있어서 기총 모드로 바꾸다가 조준선이 흐트러지는 일이 많아서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 개량을 요구했으나, 한마디로 [[렌트카|렌트 플레인]]이라 못 고쳐서 '아 시바 우리도 전투기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내용이 T-50 사업에 관한 책에 나온다. [br] 사실 F-4D가 미 공군에 배치된 것이 1966년, 한국 공군이 F-4D를 쓰기 시작한 것이 1969년임을 감안하면 당시 F-4D가 딱히 구형이었던 것도 아니다. E형 자체가 베트남전 중에 급히 개량된 신형이다. 단, 현재와 같이 완성된 F-4D가 되기까지는 좀 더 시일이 걸렸다. F-4D에 탑재할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인 [[AIM-7]]이나 레이저 유도 폭탄 및 레이저 유도 장치(Pave Tack) 등이 들어온 것은 이로부터 10년 이상 지난 뒤이다. * [[베트남전]] 당시까지 [[M1 개런드]]나 [[M1918 브라우닝]], [[M1919 브라우닝]]등 2차 대전 시절의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던 한국군은 [[채명신]] 장군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했다. 유엔군 사령관에게 2차 세계대전 이후 교전 거리의 변화와 사상자의 비율 통계 등을 들고는 설득한 결과였다. 이 설득으로 당시 미군에게 '''막 보급되던''' [[M16 소총]][*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베트남 전쟁 중기까지만 해도 여전히 많은 주월 미군의 개인 소총은 M14였다. 미군의 M16 보급의 최우선 지역은 베트남이었는데도 말이다.. 다만 주월 미군의 일선 전투부대들에겐 67년까지 보급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체 미군에 보급이 완료된 건 70년이 넘어서였다.]을 일부 받아왔고, 파병된 한국군이 M16을 슬슬 보급 받기 시작하다가 몇 년이 지나고 나서는 한국 보병이 죄다 [[M16 소총]]은 물론이요, [[M79]] 유탄발사기에 [[M60 기관총]]까지, 거의 미군 수준의 무기로 무장하고 싸운다. [br][br] 거기다가 M16이 윗몸통과 아랫몸통 모듈이 분리되며 윗몸통 부분이 아래보다 더 소모가 심한 점을 노려서 대량의 윗몸통을 땅에 파묻어 숨긴 후, "우리 윗몸통 수리할 부품이 없어요! 빨리 공급 좀 해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라며 더 받아낸 후 도로 꺼내 쓰는 페이크까지 이루어졌다. 전쟁이 중반에 접어들어 미국 내에서 서서히 반전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자 미국은 파월 한국군 한 명이 아쉬워지게 되었는데 이때부턴 대놓고 조병창에서 갓 생산되어 한국군에게 인계된 M16을 방청 포장도 뜯지 않고 한국으로 보내고선 미군에겐 상자 채로 망실 처리하여 계속 청구해서 받아내기에 이른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이건 한국군이 미군을 완벽히 등쳐먹었다기보다는 공여해준 물자를 한국이 국내로 빼돌리는 정황을 미국이 눈치 다 깐 상황에서 묵인해준 거라는 정황이 보인다. [br][br]결국 미국은 '''야 너네 물자 국내로 돌리고 계속 받아쓰는 거 이미 알고 있어. 다 좋은데 그럴 거면 차라리 그냥 너네가 라이선스 생산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지금 군필자들이 예비군 가서 보는 대부분의 [[M16A1]]이 한국제인 것은 이런 이유.] 다만 엄밀히 따지면 이건 군수 비리에 들어간다. 단지 미국이 여기에 대해서 크게 문제삼지 않았고 당사자들도 나쁜 의도가 아니라 애국하는 거라고 믿고 한 일이라 마냥 까기도 그렇지만. 귀국 박스(귀국물품을 담은 상자) 하부가 허물어져 안에 담긴 M16 소총을 발견한 미군이 감시를 강화하니, '''전사자 관'''에 M16을 같이 넣어 한국으로 물자를 돌렸다.(…) 비슷하게 밀수가 이뤄진 물건 중엔 [[발칸포]](!)도 있고, 역설계해서 국산화까지 성공했다. --이쯤 되면 무섭다.-- [br][br]이건 가난한 과거의 상처라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는 데다가, 그 뒤에 잘 알려지지 않은 [[ADD]] 연구원들의 수많은 눈물을 생각하면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5990/1|이 같은 경우]]도 있다. 적어도 이런 희생을 잊지는 말자. 현재도 이때 들어온 M16의 탄창(20발 탄창)이 현역과 예비군용 탄창으로 굴러다니고(COLT [[AR-15]]라고 쓰여있는 탄창들) 소총도 일부 후방 부대나 집총 훈련용 폐총 중에서 가끔 보이기도 한다. (라이선스 표시가 없는 모델들). * [[M113]] 장갑차도 비슷한 방법으로 국내로 400여 대를 밀수로 채웠다는 인터넷 정보가 있는데 그저 '''루머'''일 뿐이며 실제론 이관 물자에 대한 기록을 남긴 국방사 및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400여대의 거의 대부분 혹은 전부는 미국이 본토 한국군의 지원 물자로 공여해 준 물량이다.[*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2103102456|이제는 만들어진 한국군 신화에서 벗어날 때도 된 것 같은데]] 다만, 해당 게시자가 타 사이트에서 말하길. 실제로 M16 말고도 삥땅친(...) 물자는 제법 있다고 하지만,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공여된 장비의 규모에 비할 바도 아니고, 대부분 미국의 감시망에 걸려서 호된 항의를 받았다.] [[2½톤 트럭|육공트럭]]도 이 시기에 고의로 어딘가를 들이받아 손망실 처리한 후 분해하여 우리나라로 빼돌렸다.[* 다만 트럭이 워낙 튼튼하게 만들어져, 여러 번 충돌시켜야 겨우 손망실 처리할만한 상태가 됐다.] ||<:> [youtube(R5YAA_Hsmfw)] || ||<:> 월남전과 김치 그리고 애국심 || * 역시 [[베트남전]]의 이야기. 당시 미군이 한국군에게 C [[MRE|레이션]](조리 없이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통조림형 전투식량. [[MRE]]의 원조격)을 주겠다고 해놓고 막상 부대가 도착하자 보급 편의를 이유로 A 레이션(가공이 안 된 식재료. 배급할 때 "A형 식량"으로 분류)을 주겠다고 버틴다. [br][br] 이에 당시 [[김용휴]] 준장은 "지금 정글 속을 헤치고 다니는 전투병한테 등짝에 갈비를 얹고 다니란 말이냐."고 항의했고(정말 저렇게 말했다!) 결국 미군은 A 레이션에 C 레이션은 물론이고 한국군용의 K 레이션을 공급했다. C형 레이션의 한국군용 특제 버전 김치와 고추장, 장아찌, 조림요리 등이 들어간다고 알려져 있다. 이걸 만들려고 아예 통조림 생산 기술까지 들여왔다! 아울러 베트남 쌀, 한국 김치나 고추장 등도 함께 적극적으로 공급해 결과적으로 한국군은 베트남의 연합군 중 야전에서 가장 잘 먹는 부대가 되어버린다. [br][br]다만 1960년대의 한국은 전투식량을 제대로 만들 기술과 생산라인(공장)조차도 없었기에 [[6.25 전쟁]] 시기와 마찬가지로 미군이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하와이의 공장에 한국 전투식량을 주문해 만든 뒤 한국군에게 지급해주기로 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베트남 전쟁/한국군|주월한국군]] 사령부에서 조국의 공장들에게 일감을 주기 위해서 꼼수를 발휘한다. 미군 간부들 앞에서 시식 시연회를 연 뒤 한국군 병사들이 "아니 시바 맛이 이게 뭐야!"라고 하면서 [[밥상 뒤집기|식탁을 뒤집어 엎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자 '''깜짝 놀란 미군이 한국 공장에 주문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채명신]] 장군 회고록이다. 파월 장병들 중에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왜 우리가 왜놈들이 만든 김치를 먹어야 되냐?"며 분노해서 진짜로 밥상 뒤집기를 시전한 병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해방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일제의 억압을 받은 트라우마가 강했던데다가 한국이 6.25 전쟁으로 한번 리셋되면서 그 만큼 경제성장이 늦춰진 반면에 일본은 6.25 전쟁을 통해 재빠른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에 성공하여 1960년대 중반 즈음이 되면 이미 각 가정에 텔레비전과 자동차가 1대씩 보급될 정도로 경제력이 신장한지라 이대로 가면 일본에게 다시 먹히는것이 아니냐는 식의 두려움섞인 반응이 많았다.] 생산업체는 국영기업이었던 대한종합식품이다. 초대 사장은 [[김종필]] 전 총리였으며, 민영화 이후 [[펭귄종합식품]]이 되었다.[* 떠도는 이야기인 미국이 현금 구입해 보급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채명신의 회고록에서 이 부분이 나와 있는데 당시 미국의 법에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지원받는(=식량 지원을 받는) 국가에선 식량을 구매할 수 없다는 법이 있었고 이 때문에 원하던 현금 구입이 아닌 물물교환으로 타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br][br] 사실 당시 병사들의 이야기로는 일본에서 만들었던 레이션 맛이 더 뛰어나다는 평이 많았다. 당시 한국 산업 형편상 통조림은 제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 통조림 생산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김치 통조림 같은 경우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전선에 도착하고 나서 통조림을 뜯어보면 김치 국물에 벌건 녹물들이 잔뜩 섞여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병사들은 이것을 먹어야 1달러라도 고국으로 돌아간다면서 '''녹물 반 김칫 국물 반 눈물의 통조림'''을 먹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먹었던 것은 아니고 맨 처음에 통조림을 개봉해서 핏물 같은 녹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본 한국군은 경악해서 지금 장난치냐고 항의했지만 전직 장성이자 김치 통조림을 주월 한국군에게 공급하기 위해 급조된 [[펭귄종합식품|대한종합식품]] 회사 사장이 [[애국 마케팅|"여러분이 원한다면 해외에서 만든 맛있는 김치 통조림을 먹을 수 있겠지만 여러분이 피땀 흘려 번 돈은 여러분의 가족들이 아니라 왜놈들의 배를 채우게 될 것이다."]]라고 연설한 다음에 녹물이 잔뜩 섞인 김치 국물을 들이켰고 한국군 장병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따라서 녹물 김치를 먹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못 살았고, 그 당시 우리 국군 장병들이 어떤 마음으로 남의 전쟁터에서 싸움을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일화라고 볼 수 있다. [br][br] 이렇게 '''국산품'''이란 이유 하나로 병사들까지 모두 바뀐 레이션을 선호했다. 이 K 레이션의 최초 시식자는 채명신 장군이었다. 그의 '베트남 전쟁과 나'라는 회고록을 읽어보면 이때의 일을 자세히 묘사했는데, 맛이 상당히 괜찮았지만 하와이의 일본인이 만들었다고 하자 "먹는 건 내가 아니고 병사들이기에 병사들에게 먹여보겠다." 해서 통조림의 국산 생산을 위해 병사들과 입을 맞춰놨다. 파병 기간 동안 베트남 현지의 한국 기업의 보호와 전역 장병의 현지 취업, 대민 지원 등 모두 완벽하게 수행했다. 사실, 월남 파병 이전의 한국군은 군인 몸뚱아리 빼고는 군복, 수통, 야삽까지 전부 미군 원조품이라는 말이 맞을 지경이었다가, 월남 파병을 하면서 관련 산업을 일으키게 되었다. * 또 베트남전 시절의 이야기. 처음 한국군이 도착했을 때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렌드 장군은 한국군의 병력이 25,000명임을 핑계로 "한국군도 우리가 지휘하겠다"라고 나섰다. 그러자 채명신 장군이 "당신들이 도와달라고 해서 와준 건데 지금 우리 보고 당신들 지휘 받고 싸우라고? '''우리는 미군의 지원군으로 온 거지 미국의 명령을 받는 용병으로 온 게 아니다'''!"라는 요지의 항의를 하자 웨스트모어렌드 장군 이하 연합군 전원이 동의했다. 이후 미군은 한국군의 작전에 대해서 거의 손을 대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채명신 장군이 회고록에 적어놓은 협상 과정은 훨씬 길고 분위기도 험악했다. 그러나 채명신 장군 본인이 게릴라전을 경험한 지휘관이고 베트남과는 같은 분단국가, 동양인, 불교문화 국가라는 점 등을 본인이 직접 영어로 조리 있게 설명하고, 반대하는 미 장성들을 회의장에서 바로 지지자로 만들 만큼 설득력 있게 말한 것으로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 * 베트남전에서 헬기가 활약하는 것을 보고 탐이 났던 한국군은 휴즈사의 OH-6과 벨사의 [[OH-58]]을 경쟁입찰 붙였다. 원래 한국군은 [[AH-1]] 같은 본격적인 공격헬기를 원했지만, 어렵던 시절 이런 고가의 헬기를 다수 들여오기는 무리였고 OH-6은 AH-1의 반값도 안돼서 이것을 '''257대''' 사 오게 되는데 페이로드가 딸리고 사고율이 높은 등 성능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했다. 엔진 출력이 충분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지프를 들어 올리는 시범을 보여서 만족시켰으나 사실 그 1/4 지프는 내부에 엔진 같은 내부 구성품을 다 뜯어내고 껍데기만 남겨놓는 [[야바위#s-2]]였다.[br] 하지만 1970년대 당시 세계적으로 공격헬기를 보유한 나라는 '''거의 없었고,''' 200대 이상의 헬기를 원했던 한국의 경제 사정상 이보다 더 좋은 헬기를 갖기는 힘들었다. 한국군은 [[AH-1]]도 꼭 갖고 싶어서 1976년에 도입하긴 했지만 1970년대 경제 사정상 8대를 사 오는 게 한계였다. 이후 추가 도입해 현재는 60여 대를 운용한다. 당시 한국보다 훨씬 부자 나라였던 [[일본]]도 이걸 '''200대 넘게''' 샀다.[br] 이후 [[BGM-71 TOW|TOW]] 미사일 장착형을 개발하여 [[500MD]]라고 부르고 아쉬운 대로 공격헬기로 사용했다. TOW 장착형은 면허생산해서 이스라엘과 케냐에 수출해 로열티를 받는 등 나름대로의 수출 성과도 있었다.[* 정확히는 휴즈사에 개발을 의뢰했고 휴즈사는 다른 나라에도 팔수 있겠다며 판매할때 이 아이디어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팔기로 한다.] 다만 500MD는 소형 헬기였던 까닭에 토우 미사일을 만재하는 시점에서 이미 능력의 한계치에 왔다 갔다 할뿐더러 한국군이 가장 많이, 그리고 오래 굴리는 헬기였던 까닭에 사고도 많았다. * 한국군이 최신예 대함 미사일 [[하푼]] 구매를 미국에 타진하자 이웃 국가의 해군력 급상승이 아니꼬웠던 [[일본]]이 "님아 한국한테 하푼 팔지 마세염. 안 그러면 우리 재미없을 거에염"하고 로비를 시전, 결국 미국은 하푼 판매를 금지했다. 그런데 짜증이 난 한국군이 프랑스 제 [[엑조세]]로 눈길을 돌리면서 이야기가 꼬인다. 처음엔 프랑스도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판매를 거부했으나 대통령 [[박정희]]가 "요새 에어버스 판매가 부진하다는 얘기가 있던데?[* 항공기라는 게 가격이 결코 싼 상품도 아니며(상식적으로 항공기 자체의 금속값만 해도 어마어마하고, 거기에 오만가지 최첨단 안전장비와 승객들의 편의시설까지 넣는 게 바로 여객기인데 싸면 그게 이상한 거다...) 사고 한 번 터지면 인명피해가 끝내주기 때문에 미국의 검증된 물건만 사려는 경향이 강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후발 주자였던 에어버스의 A300 여객기는 유럽 이외에는 판매가 전혀 안 되고 있었다. (에어버스 인더스트리 자체가 영국·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합작 회사이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프랑스 본국 몇 대 팔고 생산라인 접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프랑스 정부는 [[영국]]·[[독일]] 정부와 양해각서까지 체결하며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던 터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영화를 찍을 때 영화 감독들이 과감히 가능성 있는 신예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것보다 하정우, 송강호, 박서준 같은 검증된 배우를 캐스팅하는 거와 비슷한 상황이다.] 엑조세 팔아주면 A300을 같이 발주하겠음"을 시전한다. 결국 한국군은 엑조세를, [[대한항공]]은 에어버스 [[A300]] 4대[* 당시 계약한 기체가 4대였다. 그리고 인도된 기체들은 각각 HL7218~7221의 레지번호를 부여받았다.]를 동시에 발주하는 것으로 협상이 타결되었고[* 이후 대한항공이 이 여객기들을 성공적으로 굴려먹자 다른 항공사들이 경계를 풀고 속속 발주를 시작했으며, 에어버스는 현재 보잉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민항기 회사가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보잉]]이 위치한 미국에서도 [[델타 항공]]과 [[제트블루]] 등 에어버스 선호 항공사들이 나오고 있다. 이 업적(?)으로 [[한진그룹]]·대한항공의 회장이던 조중훈이 1990년에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2등급에 해당되는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 훈장을 받았고(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한국인 가운데 최고 등급), 아들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역시 2004년에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3등급에 해당되는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을 받았다. 조중훈이 프랑스나 에어버스를 방문하면 레드카펫이 깔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해군은 1975년 박정희가 보는 앞에서 엑조세 발사 훈련을 실시하며 미국에게 제대로 엿을 먹인다. 죽 쒀서 프랑스 갖다 바친 꼴이 된 미국 정부는 급당황하여 하푼을 판매하기로 입장을 바꿔야 했다.[* 초기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던 미사일은 [[AGM-78|스탠다드-대레이더]] 미사일이었다.] 그런데 조중훈 회장의 회고록에는 남북간 외교전에 따른 프랑스 정부와 빅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황상 두 상황이 우연히 맞물렸을 가능성이 큰데, 방산무기 수입이라는 이유로만 큰 거래를 하면 아무리 도박이라 해도 큰 리스크이기 때문에 대의적인 명분도 필요했을 것이다.[br] 미국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이 사건 이후에 일어나긴 했지만) 엑조세가 하푼과 동급으로 평가받던 최신형 함대함 미사일로 '''엑조세 쇼크'''까지 일으킨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포클랜드 전쟁|포클랜드 전쟁]]에서의 엑조세 미사일 부분을 참고. 한국은 두 종의 최신예 대함미사일을 생산국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사용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이 엑조세를 1972년부터, [[미군]]이 하푼을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하푼을 도입한 건 1981년으로 우리나라의 하푼 도입은 '''일본보다 4년이나 빨랐다.''' --원래 당시의 일본이 이쪽 업계에서 유명한 '''호구'''다-- 물론 한국군 아니랄까봐 이렇게 강탈(?)한 엑조세와 하푼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당시 소련 붕괴로 경제적으로 허덕이던 러시아에게 로켓 엔진 기술까지 뜯어와 [[해성 대함미사일|더 좋은 것]]을 개발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